진짜 치과의사 이한나 원장이 직접 치기공을 하는 것이 맞나요?

이한나 원장이 치기공을 하게 된 스토리

저 이한나는 2002년부터 직접 왁스업을 했고,
2005년부터 직접 라미네이트를 만들었으며,
2007년부터 세렉 디지털 장비로 세라믹을 만들었고,
2018년부터 세라믹뿐 아니라 임플란트 기공까지..

제가 운영하는 치과의사이한나채널에 이런 댓글이 올라왔네요!

 

치과의사가 치기공을 하는 이유

사실 저는 제가 치아 직접 만드는 것을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었어요.

제가 치대를 졸업하고 울산에서 봉직의로 있을 때 길 건너 맞은편의 어떤 치과의사 원장님(이름을 기억 못해서 죄송하지만)께서는 지금처럼 디지털도 아닌데 직접 치기공을 정교하게 하시더라구요. 그때 저도 정말 대단하다 생각을 했었어요.

하지만 그때 그 원장님을 보고 나도 그렇게 해야지? 하는 생각은 없었어요. 왜냐하면 치기공이 엄청 시간과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힘든 작업인 걸 아니까요.

그런데 제가 1995년 1월에 개업을하고는 몇 년간은 일반적인 신경치료, 보철치료 등을 하다가 1998년 임플란트를 시작하고, 2002년부터는 치아미용치료를 하게 되었어요. 

치아미용치료를 시작하게 된 것도 제가 해야지~ 이렇게 시작한 것은 아니고 당시에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과정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치아미용에 대한 강의를 하셨고 저는그 강의에 들은 후 미용치료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막상 치아미용을 시작해보니 제가 상상한 치료결과가 잘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치기공사랑 대화도 많이 하고 치공의뢰서에 자세히 설명도 해 봤어요.

그래도 서로 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에 제가 직접 왁스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서 보냈어요.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달라고요.

그렇게 해서 2002년부터 왁스업 작업을 일일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덱스로 최적화된 치아삭제

왁스업 작업을 하고 치아미용치료를 했기 때문에 치아삭제도 작업된 왁스업모형에서 인덱스를 만들어서 하기 때문에 최적의 최소의 삭제량으로 균일한 두께의 치아를 만들 수 있었어요.   

물론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지만 왁스작업을 하지 않고 치료를 한적이 없습니다. 왁스작업을 한 후 인덱스로 치아삭제를 한 후 해당 왁스업모형을 기공소에 본과 함께 보내서 제가 원하는 모양을 만들게 되었어요. 

그렇게 하다보니 환자분들이 제가 해 드리는 치아모양을 너무 좋아해서 갑자기 제가 유명해져 버렸네요. 그래서 또 많은 고초도 겪었어요. (당시에는 치아미용을 하는 의사를 비난하던 시대였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대학원에서 배운대로 했을 뿐인데...ㅠㅠ)

원내 치기공실을 만들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치아모양이 제가 보낸 형태랑 다르게 만들어져 왔어요. 알고봤더니 저랑 손을 맞춘 기공사가 그만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공사(신재욱기공사님)를 수소문해서 저희 병원 내부에 치기공실을 만들어서 기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신기공사가 잠시 퇴사를 하게 되어 윤상희 기공사가 그 뒤를 이어서 기공을 하게 되었어요.

2005년경 윤상희기공사를 더 발전시키고자 세라믹재료 회사인 이보클라 해외 연수를 보내게 되었는데 그때 일주일 가량 기공이 밀리게 되어 할 수 없이 제가 직접 기공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왁스업을 계속 해 왔던 터라 기공마무리 과정을 하는데 무리가 없었고, 학교때부터 손으로 하는 기공과정에 대한 부담은 없어 별문제없이 치기공을 직접하게 되었어요.    

그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기공을 하면 해 본 사람은 알지만 무아지경에 이릅니다. 마음이 집중되고 평안해지거든요.  

디지털 기공으로 전환하다

그러다가 윤기공사가 그만두게 되면서 신기공사가 다시 와서 일하다가 2007년 초에 개업하려고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렇게 되니 결국 기공과정의 가장 중요한 파트인 최종왁스작업과 최종피니싱 작업을 제가 직접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 저희 병원은 미용환자가 아주 많아서 낮에는 치료하고 밤에는 기공을 하는 날들이 계속되어 몸이 너무 지쳐 있었거든요.

그러다 2007년 10월에 세렉이라는 장비가 바로 세라믹을 가공해 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억을 들여서 장비를 세팅했어요.  

그런데, 돈을 많이 들여서 과감하게 장비를 세팅했지만 말처럼 쉽게 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장비와 프로그램이랑 친해지려고 밤마다 치과에 남아서 디자인과 밀링을 반복했습니다.

어떤 날은 집에도 못 가고 치과체어에서 잤어요. 아침에 직원이 출근하면서 깜짝 놀라기도 했지요.

그렇게 해서 세렉을 이용한 라미네이트 치료를 완성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전에도 삭제량이 적은 편이었지만 (왁스업과 인덱스작업으로 치료했기 때문에) 세렉을 이용하면서 더 적은 삭제로 치료가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당시 페이닥터 중 한 사람이 제가 치료하는 과정을 보고 놀랬습니다. 삭제량이 너무 적다는 겁니다. 그 치과의사는 우리치과에 입사하기전  강남의 유명치과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 병원이 라미네이트를 엄청 많이 했는데  삭제량이 너무너무 많았다는 겁니다.

아... 기공스토리 쓰는데 곁다리로 흘렀네요. ㅎㅎ 아무튼 그렇게 저희 치과는 임플란트와 미용치료 두가지 분야를 주로 다루게 되었습니다. 

임플란트 기공을 시작하다

그러다가 2018년 여름부터 제가 임플란트치료비용을 조절하게 되었어요. 멋진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중국환자가 급감하면서 매출이 줄어들고 병원을 갑자기 줄일 수도 없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유지해 온 임플란트 비용을 조절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임플란트 비용을 조절하면서 지하철에 광고를 했는데 그 광고가잘 되어 많은 환자분들이 우리 치과를 찾게 되었어요.

그렇게 되면서 임플란트 환자를정말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치료비가 저렴해지니까 정말 상태가 심각한 환자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그런 분들을 일년에한두분 만났다면 이제는 거의 매일 그런 분들을 만나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임플란트 기공이 엄청 많아지게 되었어요.

장비를 더 도입하고 직접 기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량이 많으니까 장비 사용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해 보자고 제안했는데 직원이 못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해 보기로 했답니다. 저는 가능한한 빨리 환자분들에게 치아를 끼워 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밤에 남아서 임플란트 지대주와 지르코니아 가공까지 직접하게 되었습니다. 

디자인은 당연히 그 이전에도 제가 했었지만 지르코니아와 어버트먼트 가공까지는 제가 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면서 제가 기공전반을 더 빨리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어요. 최근에는 세멘리스 임플란트 보철 도입을 위해  정밀가공장비들을 더 도입했고, 스캔 장비들도 항상  최신버전으로 충분히 준비를 했습니다.

성격이 급한 탓에 돈을 쓰게 된 것이지요. 아마 장비만 50억 넘게 쓰지 않았나 싶네요. 

이제 제 경험을 나누려 합니다. 

지금 제 나이가 50대 중반입니다.  요즘 생각이 그래요. 내가 제일 잘한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많이 경험하고 실패를 극복한 일들을 다른 치과의사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졌어요.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말이죠. 

그래서 조만간 이와 관련된 교육이 시작될 거 같습니다. 그때 원하는 치과의사들에게는 치아디자인 직접하고 가공하는 것까지 다 알려드릴 예정입니다. 

혹시 이 댓글을 쓰신 분이 치과의사이시다면 꼭 오셔서 보시길 바랍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